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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클로드 드뷔시

1862년 8월 22일 - 생제르맹앙레(프랑스) — 1918년 3월 25일 - 파리(프랑스)

© Paul Nadar (1905)

소개

사후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클로드 드뷔시는 아마도 모든 프랑스 작곡가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관현악 음색에 대한 그의 세심한 접근, 형식적 모호성의 수용, 동양의 온음음계와 펜타토닉 음계의 혁신적 활용은 생전부터 그를 유명하면서도 논쟁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는 피아노를 위한 애수 어린 “달빛”과 두 개의 아라베스크, 시대를 연 목신의 오후 전주곡,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그리고 바다의 인상적인 “교향적 스케치”가 있다. 진정한 세계주의적 창작자였던 그는 인상주의 회화와 상징주의 시를 비롯한 다른 예술 형식에서도 자유롭게 영감을 빌려왔다. 낭만주의 음악이 스스로를 소진한 듯 보이던 시기에, 드뷔시는 “음악 예술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었다.”

초기 생애와 교육

가정환경

아실클로드 드뷔시는 1862년 8월 파리 서쪽 교외인 생제르맹앙레에서 태어났다. 노동계급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다섯 자녀 중 맏이였다. 사업에 실패한 그의 아버지는 해병 보병으로 7년간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클로드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가족은 파리로 이주했고, 1870년 보불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파리 포위전을 피해 이들은 해안 도시 칸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드뷔시는 장 체루티라는 이탈리아 음악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얼마 뒤 그는 프레데리크 쇼팽의 제자였다고 주장한 앙투아네트 모테에게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녀는 또한 시인 폴 베를렌의 장모였으며, 베를렌과 다른 상징주의 작가들은 드뷔시 음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파리 음악원에서의 교육

가족 중 예술가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드뷔시는 즉각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열 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는 앙투안 마르몽텔에게 계속 피아노를 배웠으며, 다른 교사로는 화성의 에밀 뒤랑과 오르간의 세자르 프랑크가 있었다. 재능에도 불구하고 드뷔시는 성실하지 못한 학생이었고 음악원의 상급 피아노 과정으로 진학하지 못했다. 이 무렵 그는 피아노 반주가 딸린 가곡 모음인 첫 작품들을 작곡했다.

1880년 그는 기이한 러시아 사업가 나데즈다 폰 메크에게 고용되어 그녀의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그녀와 연탄을 연주했다. 드뷔시는 세 번의 여름을 그녀의 가족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며 보냈다. 폰 메크는 러시아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친구이자 후원자이기도 했다. 10년 넘게 이어진 그들의 관계에는 두 사람이 결코 만나지 않는다는 특이한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작곡가 샤를 구노의 보살핌을 받았다. 드뷔시는 자신의 초기 스승에 대해 애정 어린 글을 남겼다. “구노의 예술은 프랑스 감수성의 한 순간을 보여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것은 잊히지 않는다.”

로마 대상 수상

드뷔시는 1884년 로마 대상을 수상했다. 이 권위 있는 상에는 로마 유학을 위한 장학금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전 수상자로는 헥토르 베를리오즈, 구노, 비제가 있었다. 20여 년 뒤 그의 동료이자 때로는 경쟁자였던 모리스 라벨이 이 콩쿠르에서 수상하지 못하자 전국적 스캔들이 일어났다. 

로마 대상은 수상자들이 자신의 발전을 증명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작품을 제출하도록 규정했다. 드뷔시의 작품들은 언제나 호평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쥘 마스네는 한 작품에 대해 “그는 수수께끼다”라고 답했다. 드뷔시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싫어했지만, 라소와 팔레스트리나 같은 후기 르네상스 거장들의 다성 합창 음악은 깊이 존경했다. 그는 화가들과 어울리기를 즐겼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악보를 연주하며 몇 시간을 보내곤 했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는 음악적으로 보수적인 음악원이 강요하는 규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을 적었다. “나는 자유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는 선언했다. “내 생각을 너무나 아낀다!”

드뷔시: 소리의 탐험가

초기 영향: 간직한 것과 버린 것

드뷔시의 초기 음악적 영향은 첫 피아노 수업과 음악원 시절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교사들은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을 비롯한 정전의 기둥들을 소개해주었다. 앙투아네트 모테는 그에게 평생 지속된 쇼팽에 대한 애정을 심어주었고, 이는 그의 마지막 피아노 작품 모음인 12개의 연습곡에서 가장 깊이 드러난다.

드뷔시의 가장 강력한 초기 영향 가운데 하나이자 훗날 그가 부정하게 될 인물은 리하르트 바그너였다. 강렬한 감정의 분출과 획기적인 화성을 지닌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1865년 초연 당시 큰 충격파를 일으켰다(레너드 번스타인은 이를 “음악사 전체의 중심 작품”이라고 불렀다). 젊은 시절 드뷔시는 악보 전체를 암기하여 연주할 수 있다는 내기에서 이겼고, 바이로이트에 있는 바그너의 오페라 극장을 두 차례 순례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뒤 그는 독일인의 양식적 혁신을 단호히 거부했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 미친 바그너의 거슬리는 영향을 언급하며, 그는 “모든 것을 찢어버리고 더 개인적인 어법의 새로운 화학작용을 찾아 나섰다.” 10년 뒤 그는 바그너주의를 “새벽으로 오해받은 아름다운 석양”이라고 선언했다.

동양의 영향

드뷔시는 러시아 거장들에게서 습득한 기법은 더 많이 간직했다. 폰 메크와의 인연을 통해 그는 모스크바 여행 중 러시아 작곡가들의 악보를 손에 넣었다. 그는 특히 강력한 소수파로 알려진 5인조의 구성원들, 그중에서도 알렉산드르 보로딘, 모데스트 무소륵스키(그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펠레아스에 영향을 주었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을 받았다. 이 작곡가들에게서 드뷔시는 중세 선법, 동양 음계, 인상주의적 관현악법을 흡수했다. 1889년 그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석하여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러시아 음악을 지휘하는 것을 들었다. 

박람회에서 드뷔시는 자바 가믈란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들었다. 타악기의 풍부한 다양성, 복잡한 다성음악, 온음음계와 펜타토닉 음계의 사용은 그에게 계시와도 같았다. 이후 그는 그 앙상블이 서양 화성을 “영리한 어린아이들에게나 쓸모 있는 공허한 유령”처럼 들리게 만든다고 썼다. 그가 이 음계들을 사용한 범위는 광범위했으며, 가믈란의 징과 실로폰이 내는 타격음을 모방한 것 역시 그러했다. 그의 현악 사중주 제2악장 [53:30]에는 현을 뜯는 소용돌이 같은 음형이 넘쳐난다.

음악 외적 영향

세기말 파리는 드뷔시에게 풍부한 영감을 제공했다. 상징주의 시의 유동적인 구조와 모호한 시구는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비롯한 그의 초기 작품에 유연성을 불어넣었다. 교향시 마법사의 제자로 가장 잘 알려진 폴 뒤카는 “드뷔시가 받아들인 가장 강력한 영향은 음악가의 것이 아니라 문필가들의 것이었다”고 썼다. 샤를 보들레르의 번역 덕분에 프랑스에서 존경받던 에드거 앨런 포 역시 드뷔시에게 영감을 주었다(라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드뷔시는 포의 단편소설에 바탕을 둔 오페라 두 편을 시작했지만 어느 것도 완성하지 못했다.

시각예술의 세계 역시 큰 자극이 되었다. 그는 에드가르 바레즈에게 “나는 음악만큼이나 그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처럼 위대한 파리 예술가들이 그의 친구였으며, 클로델은 그에게 왈츠의 소형 작품을 선물했다. 그는 자신의 많은 작품에 회화에 어울릴 법한 묘사적 제목을 붙였다(영상, 아라베스크, 구름 등이 그 예다). 비평가들은 그를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클로드 모네 등에 비유했다. 

드뷔시는 인상주의자인가?

“인상주의”는 탄생 때부터 논쟁적인 용어였다. 1872년 모네가 자신의 그림 인상, 해돋이를 처음 선보인 직후, 비평가들은 이 용어를 비난의 뜻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시기의 음악에도 이를 적용했다. 이 용어는 드뷔시가 로마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의 음악을 묘사하는 데 처음 쓰였다. 아카데미의 한 평론가는 그의 교향 모음곡 봄에 반응하며 이렇게 썼다. “그에게는 음악적 색채에 대한 감각이 있음을 알아볼 수 있으나, 그것을 과장한 나머지 그는 선과 형식의 정확성이 지닌 중요성을 너무 쉽게 잊는다. 예술 작품에서 진실의 가장 위험한 적 가운데 하나인 이 모호한 ‘인상주의’를 경계하기를 강력히 바란다.”

드뷔시의 이 용어에 대한 감정은 오락가락했다. 드뷔시가 지휘한 바다 공연의 프로그램 노트에는 “한마디로 말해, 이국적이고 세련된 예술을 따르는 음악적 인상주의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같은 해 드뷔시는 분노하며 이렇게 적었다. “나는 다른 어떤 것,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을 시도하고 있다—바보들이 인상주의라고 부르는 것, 거의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부적절한 용어 말이다.”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클로드 모네의 제자”라고 불리는 것을 영예로 여겼다는 점이다.

전기 작가 로이 하워트가 지적하듯, “포레처럼 드뷔시는 흔히 동일한 기본 소재를 서로 다른 선법으로, 혹은 전략적으로 옮긴 베이스와 함께 병치한다. 이는 진정한 인상주의 기법에 대한 그의 가장 문자 그대로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러 각도에서 빛을 받는 모네의 고정된 대상(성당이든 건초더미든)에 해당한다.” 그의 모호하고 흔히 방향성 없는 화성은 선언하기보다 암시하며, 관현악 음색에 대한 집요한 접근은 화가의 팔레트와 닮아 있었다. 그는 하프 하모닉스, 약음 심벌즈, 가사 없는 합창 등을 비롯한 기법을 도입했다(라벨은 이를 다프니스와 클로에에서 차용했다). 목신의 오후 전주곡 같은 작품은 전체 악기군보다는 개별 악기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음색을 강조한다.

드뷔시는 음악을 이야기할 때 흔히 시각적인 묘사를 사용했다. 음색은 색채 관계에 빗대어 설명되었다. 그는 한 학생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인상을 모아라. 서둘러 그것을 적어두려 하지 마라. 왜냐하면 음악은 회화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하나의 그림 안에 색과 빛의 변화를 집중시킬 수 있다—너무나 명백함에도 대체로 간과되는 진실이다.”

드뷔시의 작품: 소리의 혁명

목신의 오후 전주곡

드뷔시는 기념비적인 목신의 오후 전주곡을 1894년에 완성했다. 그는 친구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시는 숲에서 낮잠을 자고 깨어난 호색적인 목신이 두 님프와의 열정적인 만남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이 실제였는지 상상이었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한다.

말라르메에게 시의 목표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드뷔시의 전주곡은 리스트나 슈트라우스식 의미의 교향시가 아니다. 명확한 서사를 들려주는 대신, 음악은 이야기의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작품은 그리스 신 판의 시링크스를 연상시키는 구불거리는 플루트 독주로 시작한다. 온음음계, 불협화음의 삼전음, 느리고 자유롭게 흘러가는 선율이 꿈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전주곡의 유동적인 모호성은 조용한 음악 혁명을 촉발했다. 베토벤이 보여준 방향성 있는 진행과 정면으로 대조되며, 이 음악은 나른한 정지 상태를 즐긴다. 드뷔시의 옹호자였던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가 “드뷔시의 목신에 나오는 플루트는 음악 예술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었다”고 말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유일하게 완성한 오페라인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1902년 초연된 뒤, 드뷔시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오랫동안 극장을 위한 음악을 쓰고자 애써왔지만, 내가 원한 형식은 너무나 이례적이어서 몇 차례 시도한 뒤 그 생각을 포기했다.” 이상적인 대본을 찾는 그의 탐색은 거의 2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수많은 텍스트를 검토했으나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지 못하다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상징주의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읽고서야 발견했다. 그는 초연을 본 뒤 마테를링크에게 이 텍스트에 곡을 붙일 허락을 구했다. 

오페라는 홀아비 골로가 숲에서 길을 잃은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울고 있는 소녀 멜리장드를 발견하고, 그녀는 골로의 성으로 돌아가는 데 동의한다. 두 사람은 결혼하지만, 그녀는 그의 동생 펠레아스와 사랑에 빠진다. 골로는 두 사람을 발견하자 동생을 죽이고 임신한 아내를 뒤쫓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아이를 낳고 죽는다. 관습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 줄거리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거의 없으며, 관객들은 독립된 곡과 아리아가 거의 전적으로 부재한 데 당황했다. 드뷔시는 펠레아스의 전작들에 대해 “노래가 너무 많고 음악적 설정은 지나치게 번거롭다”고 불평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영혼의 감정 표현”이라고 묘사한 것을 강조했다.

드뷔시의 음악 역시 그만큼 표현적이다. 악보의 상당 부분은 온음음계와 목적 없이 떠도는 화성 진행을 사용하며 일반적인 조성 체계에 도전한다. 중세 선법의 선율은 시간 밖에 존재하는 듯한 신비로운 감각을 고조시킨다.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서 구성한 거대한 편성에 맞서, 드뷔시는 오케스트라를 더욱 섬세한 효과를 위해 사용했다. 오케스트라는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극을 압도하기보다 뒷받침한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바그너의 영향을 부인했지만, 사적으로는 라이트모티프의 사용을 빌려왔음을 인정했다.

초기 반응은 엇갈렸다. 반현대주의자들은 이를 싫어했고, 반동적인 구세대의 원로였던 카미유 생상스는 특히 드뷔시에게 가혹했다. 한 평론가는 이 음악을 삐걱거리는 문의 불협화음에 비유했다. 더 젊고 진보적인 청중과 전위예술의 구성원들은 이 작품을 기적처럼 여겼다. 답답한 교수들과 갈등을 겪던 당시의 불만 많은 음악원 학생 모리스 라벨은 모든 공연을 관람했다. 

펠레아스는 드뷔시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10년 안에 이 작품은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초연되었다. 1913년까지 오페라코미크는 이 작품을 100회 공연했다. 프랑스에서 드뷔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분열은 더 깊어졌고, 반대자들은 지나치게 현대적이라고 여긴 작품들에 “드뷔시즘”이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바다

1905년의 바다와 함께 드뷔시는 미지의 음악적 바다로 항해했다. 그는 각 악장을 “교향적 스케치”라고 불러 교향곡과 표제적 교향시라는 독일 전통 양쪽의 바깥에 놓았다. 각 악장은 형식적 구조를 피하고, 관습적인 화성 규칙을 위반하며, 주제 전개를 회피한다. 개별 악기 선율에는 전례 없는 수준의 자유가 주어져 더 다양한 음색을 가능케 한다. 바다의 악보가 출판되었을 때, 그는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큰 파도가 표지를 장식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초기 반응은 좋지 않았다. 대서양 양안의 비평가들은 혹평했고(한 비평가는 제목을 “뱃멀미”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르 탕의 한 평론가는 “나는 바다를 듣지도, 보지도, 냄새 맡지도 못한다”고 비꼬았다. 드뷔시 자신도 이 작품에 다소 불경한 태도를 보이며, 바다는 “어떤 C. D.의 바다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썼다.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드뷔시는 1880년대 후반부터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지만, 15년 넘게 출판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출판사가 이를 발표한 1905년, 드뷔시는 바다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같은 대규모 작품에서 벗어나 더 작은 실내악 작품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드뷔시 개인사에서 격동의 시기였다. 그의 피아노 학생 중 한 명의 어머니인 가수 엠마 바르다크와의 불륜은 파리 상류사회에서 스캔들을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드뷔시의 아내 릴리는 자살을 시도했고, 두 사람의 많은 친구들은 그녀의 편을 들었다. 이혼 소송에 휘말린 그는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 모음곡 출판에 동의했을지도 모른다.

제목은 폴 베를렌의 1869년 시 “달빛”에서 왔다. 드뷔시는 다른 어떤 시인보다도 베를렌의 시에 자주 곡을 붙였다. 대략 80곡에 이르는 그의 가곡 가운데 거의 4분의 1이 잊힌 아리에트 연가곡을 포함해 베를렌의 시를 사용한다. 그는 심지어 베를렌의 시집을 늘 들고 다녔다. 두 악장인 미뉴에트와 파스피에는 바로크 시대 프랑스 궁정 무용의 이름을 따왔다. 동시대의 다른 프랑스 작곡가들처럼 드뷔시는 현대적 음악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옛 프랑스 거장들에게 눈을 돌렸다.

드뷔시의 가장 오래 사랑받는 작품이자 모든 피아노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달빛”은 별다른 소개가 필요 없다. 그 선율은 소리로 바뀐 반짝이는 달빛이며, 센 강의 어두운 물 위로 드리운 은빛의 가느다란 실이다. 드뷔시는 단조로 행복한 말을 노래하는 어릿광대들을 이야기하는 베를렌의 시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는 달빛과 어우러지고,
슬프고 아름다운 달빛과 어우러지니,
그 달빛은 나무 위 새들을 꿈꾸게 하고
물줄기들을 황홀하게 흐느끼게 하며,
대리석 조각상 사이로 흐르는 크고 가느다란 물줄기들을 흐느끼게 한다.

12개의 연습곡

1909년 직장암 진단을 받은 드뷔시는 마지막 10년을 장기적인 신체 쇠약 속에서 보냈다. 당시에는 새로운 시술이었던 결장루 수술을 받은 뒤, 그는 남은 생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보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더욱 심각한 창작적·실존적 위기를 촉발했다. 프랑스가 동원을 시작한 지 며칠 뒤 그는 “나는 이 끔찍한 대격변 속에 내던져진 비참한 원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그는 1915년 여름을 노르망디의 한 별장에서 보냈다. 서부 전선에서 겨우 70마일 떨어진 곳이었지만, 드뷔시는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연습곡을 비롯해 여러 작품을 완성할 창작 에너지를 찾아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쓰고 있다”고 그는 썼다. “아니면 다음 날 아침 죽도록 선고받은 사람처럼.”

연습곡은 191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드뷔시가 남긴 마지막 피아노곡 모음이다. 이 곡들은 “프레데리크 쇼팽을 추모하며”라는 헌사를 지니는데, 쇼팽 자신의 에튀드는 교육학을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모범이었다. 피아니스트들에게 별다른 애정을 품지 않았던 드뷔시는 이 모음곡의 악마 같은 난이도를 즐겼다. 그는 리스트풍의 옥타브 기교와 까다로운 반음계 악구를 포함해, 이 곡들에는 “피아니스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하는 천 가지 방법”이 담겨 있다고 농담했다. 

유희

드뷔시는 발레 뤼스의 흥행가 세르게이 댜길레프와 안무가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요청으로, 유일한 발레인 유희 [59:41]의 악보를 완성했다. 이 춤추는 시의 시나리오는 황혼의 정원에 있는 한 젊은 남자와 두 소녀에 관한 것이다. 세 사람은 잃어버린 테니스공을 찾으며 숨바꼭질을 하다가 정원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사라진다.

악보는 밤의 신비와 세 무용수 사이의 에로틱한 긴장감을 모두 포착한다. 느리고 분위기 있는 악구는 장난기 넘치는 에너지로 진동하는 부분과 교차한다. 드뷔시는 선율의 반복을 피하고 짧고 변화무쌍한 제스처를 택했다. 이 걸작은 관현악 음색에 대한 작곡가의 정밀한 접근을 보여준다. 어떤 순간에는 목관 독주자들이 선율 파편을 주고받고, 또 다른 순간에는 드뷔시가 실로폰, 바이올린 피치카토, 플루트 트릴의 타악기적 소리를 대비시킨다.

유희는 여전히 간과된 걸작으로 남아 있다. 형식의 모호함 때문에 청중과 음악가들은 이 작품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고, 그 결과 오케스트라들은 더 이해하기 쉬운 드뷔시의 작품을 선택한다. 유희는 1913년 5월 15일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초연된 불운도 겪었다. 2주 뒤, 이 작품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획기적인 봄의 제전 개막에 가려졌다.

드뷔시가 클래식 음악에 미친 영향

그가 55세에 세상을 떠날 무렵, 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어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는 역대는 물론 20세기 프랑스 작곡가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인물로 남아 있다. 라벨은 자신의 동료가 “프랑스 음악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천재였으며…. 자신만의 법칙을 만들고 끊임없이 진화하며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면서도 언제나 프랑스 전통에 충실한 위대한 개성”이었다고 회고했다. 프랑스와 해외에서 라벨은 비공식적으로 그의 직계 후계자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동시대인들, 미래 세대의 음악가들, 그리고 광범위한 문화 전반에 미친 드뷔시의 영향력은 계속 커졌다. 앙리 뒤티유, 올리비에 메시앙, 불레즈를 비롯한 프랑스 작곡가들은 모두 그의 양식에 빚을 지고 있었으며, 에런 코플런드, 벤저민 브리튼, 벨라 바르톡 같은 국제적 작곡가들도 마찬가지였다(바르톡은 헝가리 동포 졸탄 코다이와 함께 드뷔시의 펜타토닉 음계 사용에서 헝가리 민속음악과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그를 시대에 뒤떨어진 기성세대 인물로 본 이들조차 그의 양식에 반대되는 위치에서 자신을 규정했다. 그가 죽은 뒤 전위예술의 박식가 장 콕토는 “구름, 파도, 수족관, 물의 요정, 야행성 향기는 이제 그만”이라고 조롱했는데, 이는 드뷔시 작품의 제목들을 명백히 가리킨 것이었다. 

그는 교육보다 작곡에 집중하기를 선호했기에 제자가 거의 없었다. 교육자로서 드뷔시의 유산은 그가 지도했던 사람들과 함께한다. 조지 코플랜드, 마르셀 메예르, 마리우스프랑수아 가야르를 비롯한 피아니스트들은 그가 사망한 뒤 수년간 그의 작품을 연주하며 그의 인상주의적 접근을 보존했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오페라 발전에 오래 지속되는 영향을 미쳤다. 드뷔시는 대본가와 협업하는 대신 마테를링크의 희곡을 바탕으로 자신의 대본을 만들었다. 이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살로메)와 알반 베르크(보체크)를 비롯한 작곡가들은 기존 원전 자료를 편집하여 대본을 만들었다. 레오시 야나체크는 자신의 오페라를 만들 때 프랑스어 말의 리듬을 밀접하게 반영하는 드뷔시의 자연주의적 텍스트 처리 방식을 연구했다. 20세기 성악을 위한 가장 뛰어난 프랑스 작곡가로 손꼽히는 프랑시스 풀랑크는 자신의 오페라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에 드뷔시가 미친 영향을 인정했다.

드뷔시가 재즈에 미친 영향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 결실 풍부한 상호 교류를 보여준다. 그의 여러 작품은 래그타임, 재즈, 블루스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장르를 흡수했으며, 재즈 음악가들은 다시 그의 화성 접근법을 차용했다(특히 플랫된 “블루” 음을 근사하는 음향 음계의 사용은 매우 적합한 것으로 드러났다). 듀크 엘링턴은 바다를 비롯한 드뷔시의 악보를 연구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아마 가장 중요하게도 드뷔시는 서양 작곡가들을 100년 이상 지속된 오스트리아-독일 문화 지배에서 해방하는 데 기여했다. 바그너의 영향력을 한탄하던 그의 친구 에리크 사티는 프랑스 작곡가들에게 그들만의 음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능하다면 사워크라우트 없이.” 드뷔시의 음악은 형식 전개에 대한 베토벤식 접근에서 벗어나는 길을 넓혔다. 그는 달빛에 관한 짧은 곡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드뷔시는 애수 어린 살롱 음악의 작곡가 이상이었다. 그는 음악 모더니즘의 최전선에 있었다.

클로드 드뷔시: 주요 연표

  • 1862: 클로드 드뷔시가 파리 서쪽 교외 생제르맹앙레에서 태어난다. 1864: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태어난다. 1865: 장 시벨리우스가 태어난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초연된다. 미국 남북전쟁 말기에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된다.
  • 1866: 페루초 부소니와 에리크 사티가 태어난다.
  • 1869: 헥토르 베를리오즈가 사망한다.
  • 1870: 보불전쟁 중 드뷔시 가족은 파리 포위전을 피해 칸으로 피신하며, 그곳에서 드뷔시는 첫 피아노 수업을 받는다.
  • 1872: 드뷔시는 열 살에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다.
  • 1874: 찰스 아이브스와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태어난다. 인상주의 운동의 명칭에 영감을 준 것으로 여겨지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파리에서 전시된다.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가 초연된다.
  • 1875: 모리스 라벨이 태어난다. 조르주 비제는 자신의 걸작 오페라 카르멘 초연 3개월 뒤 사망한다.
  • 1880: 차이콥스키의 후원자인 나데즈다 폰 메크가 드뷔시를 피아니스트로 고용하고, 그는 이후 세 번의 여름을 그녀와 그녀의 가족과 함께 여행하며 보낸다.
  • 1881: 파블로 피카소가 태어난다.
  • 1883: 리하르트 바그너가 사망한다.
  • 1884: 드뷔시는 칸타타 탕자의 귀환으로 로마 대상을 수상한다.
  • 1886: 프란츠 리스트가 사망한다.
  • 1889: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은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음악 프로그램을 본다. 이들은 같은 축제에서 자바 가믈란 음악을 듣고, 이 음악과 양식은 그들의 이후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에펠탑이 완공된다.
  • 1893: 현악 사중주가 초연된다. 샤를 구노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가 사망한다.
  • 1894: 목신의 오후 전주곡 초연.
  • 1895: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처음으로 상업 상영한다.
  • 1899: 드뷔시가 릴리 텍시에와 결혼한다.
  • 1902: 드뷔시의 기념비적인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초연된다. 리카르도 비녜스가 라벨의 물의 유희를 초연한다.
  • 1903: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로 임명된다.
  • 1904: 드뷔시는 자신의 학생 중 한 명의 어머니이자 가브리엘 포레의 전 연인이며 뮤즈였던 엠마 바르다크와 불륜을 시작한다. 그해 말 드뷔시의 아내 릴리가 자살을 시도하여 스캔들이 일어난다.
  • 1905: 바다가 콜론 콘서트에서 엇갈린 반응 속에 초연된다. “달빛”을 포함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이 출판된다. 엠마 바르다크가 두 사람의 딸 클로드엠마를 낳는다.
  • 1908: 드뷔시와 엠마 바르다크가 결혼한다. 라벨의 관현악을 위한 스페인 광시곡이 초연된다. 라벨이 독주 피아노를 위한 밤의 가스파르를 완성한다. 찰스 아이브스가 대답 없는 질문을 작곡한다. 올리비에 메시앙이 태어난다.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태어난다. 파블로 데 사라사테가 사망한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사망한다.
  • 1909: 음악원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된다. 대장암 진단을 받는다.
  • 1910: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불새가 팔레 가르니에에서 초연된다. 드뷔시는 참석하여 작곡가를 만난다.
  • 1912: 라벨의 발레 다프니스와 클로에가 초연된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멜로드라마 달에 홀린 피에로가 초연된다. RMS 타이타닉호가 북대서양에서 침몰한다.
  • 1913: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초연된다.
  • 1914: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며, 전쟁은 한 달 뒤 시작된다.
  • 1915: 드뷔시가 암 치료를 위해 결장루 수술을 받는다.
  • 1917: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가 작곡되고 초연된다. 이는 드뷔시의 마지막 주요 작품이자 마지막 공개 연주다.
  • 1918: 드뷔시가 55세의 나이로 대장암으로 사망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11월 11일 휴전협정 체결과 함께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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