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소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1920년 8월 22일, 막스 라인하르트의 연출로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도덕극 『예더만』이 돔광장에서 초연되며 막을 올렸다. 이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오페라, 연극, 콘서트를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2010년 시즌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90주년을 기념했으며, 동시에 위르겐 플림, 헬가 라블슈타들러, 게르베르트 슈바이크호퍼의 운영진이 함께한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다. 2011년에는 마르쿠스 힌터호이저가 예술감독을 맡고, 헬가 라블슈타들러는 새로운 경제적 책임을 지닌 회장으로 활동한다. 2012년부터는 알렉산더 페레이라가 예술감독을, 헬가 라블슈타들러가 운영진을 구성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탄생 시점은 1920년 8월 22일, 막스 라인하르트의 무대 연출로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도덕극 『예더만』이 돔광장(대성당 광장)에서 처음 공연된 때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기원은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알프스 북쪽에서 최초로 공연된 오페라는 아마도 잘츠부르크에서 올려졌을 것이다. 잘츠부르크의 대공과 대주교 궁정에서는 음악과 연극이 대단한 화려함 속에 명망 높게 공연되었고, 사람들은 수많은 종교극과 세속극에 매료되었다. 모차르트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서 깊은 잘츠부르크 대학교에서는 드라마와 징슈필이 공연되어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잘츠부르크 대성당은 언제나 장엄한 교회음악 연주와 행렬을 수반한 교회 축제의 무대였다.

잘츠부르크의 연극적 스펙트럼은 중세의 신비극과 수난극, 궁정 바로크 축제에서 시민 연극 전통이 자리 잡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확장된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이러한 밀도 높은 예술적 분위기 속에서 1756년 1월 27일 태어났다. 작곡가의 아들들이 참석한 가운데 1842년 모차르트 기념상이 성대히 제막되면서, 이곳의 수호신을 기리는 전통의 초석 또한 놓였다. 이후 잘츠부르크에서 정기적인 모차르트 음악제를 개최하자는 제안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1877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국제 모차르트 재단의 초청을 받아 음악제를 위해 잘츠부르크를 방문했고, 빈 이외의 도시에서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연주했다. 1887년 지휘자 한스 리히터는 같은 맥락에서 바이로이트를 본보기로 한 연례 모차르트 축제를 지지했다.

19세기 말에 정립된, 잘츠부르크에서 정기적인 모차르트 축제를 열자는 구상에 따라 1917년 프리드리히 게마허와 하인리히 다미슈의 주도로 빈에서 잘츠부르크 페스트슈필하우스 공동체라는 협회가 설립되었다. 그 목적은 축제극장 건립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한편 잘츠부르크에 축제를 세우려는 생각은 이미 다른 여러 집단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시인 헤르만 바르는 이 구상에 헌신했다. 잘츠부르크 슈타트테아터(오늘날의 란데스테아터)에서 경력을 시작하고 1918년 레오폴츠크론성을 매입한 막스 라인하르트는 1917년 빈에서 헬브룬 축제극장 건립에 관한 메모랜덤을 제출했다. 1919년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위한 프로그램 초안을 발표했다. 이로써 잘츠부르크 시민계층의 주도로 비롯된 축제 구상 – 아마도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시민 উদ্যোগ – 은 빈의 영향력 있는 주역들로부터 지적 토대를 부여받았다.

호프만스탈의 『예더만』 공연 이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불안정한 경제 상황과 초기의 공적 보조금 부재에도 불구하고 무대미술가 알프레트 롤러,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지휘자 프란츠 샬크의 참여를 통해 빠르게 국제적인 기반을 확립했다. 특히 히틀러가 천 마르크 금지령을 내려 독일 관객의 방문이 끊긴 1933년부터는, 잘츠부르크가 바이로이트의 대안으로 내세워졌다. 페스티벌은 부유한 서유럽인과 미국인들을 잘츠부르크로 끌어들였으며, “반파시스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 역할을 했다” (에른스트 하니슈, 하인츠 돕슈의 『잘츠부르크 시의 역사』, 1996 인용). 그러나 이는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페스티벌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양가적 특성, 단절과 연속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생생하게 서술될 수 있다. 양가성은 전통과 현대라는 양극 사이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근대성의 반현대적 산물”(게오르크 크라이스, 『페스티벌』, 1991)로 스스로를 위치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부르주아성과 진보성, 보수적 가톨릭주의 혹은 국민적 재정의와 새롭게 각성된 세계주의, 그리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방향 설정 사이의 길항 관계였다(미하엘 슈타인베르크,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기원과 이데올로기 1890–1938』, 2000 참조). 전통과 현대 사이의 이러한 양가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페스티벌 구상을 위한 노력과 그에 대한 비판을 거듭 불러일으켰다.

처음에 페스티벌 구상은 오스트리아의 문화 전통, 이곳의 수호신, 그리고 바로크 도시 특유의 풍경과 밀접하게 연결된 최고 수준의 탁월한 예술 행사를 확립하려는 열망에 바탕을 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과 전반적인 방향 상실 이후, 페스티벌의 창설은 새로운 오스트리아 정체성의 형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고, 전통으로의 회귀를 통해 문화적 복원이 이루어졌다. 페스티벌 창립자들의 발언은 이 양극 사이를 오간다. “잘츠부르크에서 음악과 연극의 축제를 조직한다는 것은 오래된 살아 있는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살리는 것을 뜻한다. 즉, 오래되고 의미 있으며 빼어난 장소에서, 언제나 그곳에서 행해졌던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 (후고 폰 호프만스탈, 『잘츠부르크의 페스티벌』, 1921)

“모든 예술이 지닌, 그리고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연극도, 가톨릭 교회의 요람 안에 아직 머물러 있던 시대의 연극도 지녔던 축제적이고 휴일 같으며 유일무이한 특성, 그것을 연극에 되돌려주어야 한다.” (막스 라인하르트, 페르디난트 퀸첼만에게, 1918년 7월 21일)

장엄한 문화유산을 성찰함으로써 오스트리아 문화사와 문화정책의 하나의 상투적 명제가 언급되는데, 이는 극도로 복합적인 현상을 나타낸다. 전간기와 전후 시기는 모두 이 현상으로 특징지어진다. 나치의 잔혹 행위가 남긴 공포 이후에도 예술과 문화는 약화된 국민적 자존감을 보상하기 위한 촉매 역할을 했다.

동시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위기, 의미의 위기, 가치의 상실, 개인 인간뿐 아니라 전체 민족의 정체성 위기”(헬가 라블슈타들러)에 맞서는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한가운데, 서로 전쟁을 벌이던 국가들을 하나의 공동 목표를 제시할 페스티벌을 통해 화해시키겠다는 결의가 무르익었다. 그렇기에 평화와 유럽에 대한 믿음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 비할 데 없이 표현한 최초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계획을 위한 호소문”(1919)의 중심에 놓여 있다. “1750년부터 1850년까지의 시대를 충만하게 하고 계몽했던 유럽주의.” 이처럼 영원히 유효한 창립 사명을 수행할 수 있거나 수행해야 하는 축제가 또 어디에 있는가?

라인하르트와 호프만스탈의 페스티벌 구상이 잘츠부르크에서 촉발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대도시에서 멀리,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난 곳에 페스티벌을 순례지로, 연극을 피난처로 세우고자 했다. “우리 시대의 불안, 일상의 사건들이 야기하는 어려움은 대도시에서 너무나 큰 규모를 띠며 우리를 억누르고 짓누르기에, 저녁이 되어도 우리가 바라는 만큼 그날의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연극은 그 자체로 제시될 수도, 받아들여질 수도 없다. 대도시에서는 마음으로 진정한 축제를 누릴 수 없다.” (막스 라인하르트, 『축제의 연극』, 1935)

반현대성뿐 아니라 반대도시적 정서 또한 이 특별한 페스티벌을 특징지었으며, 이는 사람들을 하나의 범유럽적 프로젝트로 결집시키고자 했다. 경제적·관광적 고려 또한 실질적인 역할을 한 가운데, 넓고 큰 세계를 작은 도시에 불러들이고자 했고, 그 결과 잘츠부르크는 “유럽의 심장 한가운데의 심장”으로 양식화되었다. 이러한 대조적 현실은 막스 라인하르트로 하여금 페스티벌은 “부유하고 배부른 이들을 위한 사치품일 뿐 아니라 궁핍한 이들을 위한 양식이어야 한다”고 기억할 만한 말을 남기게 했다. (막스 라인하르트, 『메모랜덤』, 1917)

거대한 역사, 세계사가 페스티벌의 작은 역사에 반영되는 것처럼, 웅대함은 예컨대 한스 푈치히의 헬브룬 축제극장 설계안과 같이 작은 규모로 구현된다. “어떤 의미에서 잘츠부르크에 계획된 축제극장은 […] 베를린에서의 해결책과 구상의 반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푈치히는 그곳에 라인하르트의 대연극장을 계획했다]. 이곳에는 베를린이라는 대도시의 도시 연극이 있고 – 저곳에는 지방에서 도시의 일상적 사건들과 떨어진 ‘봉헌’과 ‘빛’의 축제극장이 있다.” (콘스탄체 슐러, 『무대로서의 제단』, 2007)

풍경과 건축을 결합하고자 했던 이 선구적 프로젝트는 기대했던 국제적 재정 지원의 부재로 인해, 그리고 심각한 통화 가치 하락으로 야심 찬 계획이 실패할 운명에 처하면서 유토피아, 즉 ou-tópos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607년에 세워진 궁정 마구간을 개조하여 축제극장으로 바꾸었고, 축제 지구의 건축은 클레멘스 홀츠마이스터가 주도하게 되었다. 유토피아는 도시와 그 주변의 산악 지대 안에서 실현되었고, “무대로서의 도시”라는 신화가 되살아났다. 잘츠부르크에서 명망 높은 행사들이 펼쳐진 바로크 문화의 반복적 이미지는 곧 대세계극이었다. “세계를 위해 객석을 세우는”, “전체를 지탱하는 은유”(후고 폰 호프만스탈, 1922)였다. 어느 정도까지 잘츠부르크의 가장 중요한 세속적·종교적 장소들은 서로 연결되었고, “세계극장”이라는 바로크적 개념에 따라 도시 전체가 무대로 바뀌었다(슐러, 2007 참조).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1922년 콜레기엔키르헤에서 초연된 자신의 『잘츠부르크 대세계극』에서 이 은유를 신비극으로 양식화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가장 양극화된 반응을 불러일으킨 작가이자 잘츠부르크에서도 소란을 일으킨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60년 뒤 이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극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교황도 위대한 배우입니다. 그가 아주 저급한 연극을 배웠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물론 이제 가장 위대한 배우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세계극입니다. […] 나는 세계극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 어쩌면 무대 상부의 격자 어딘가에 있겠지요. 나는 어떻게든 끌려갑니다. 그들은 무대장치 한 조각을 당기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수백만 혹은 수십억이 그곳에서 당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저기서 배경이 움직입니다 […]. 하지만 앞에 있는 이 몇몇 인물은 응접실극을 연기합니다. 그리고 교황은 흰 예복으로 위엄을 만들어냅니다. 불가해한 이는 대개 동쪽에서 옵니다. 다시 말해 붉은 이, 어두운 이, 두려운 이입니다. […] 그러고 나서 희극적 인물이 나옵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요 […] 그다음에는 술친구들, 등장하는 젊은 직공들, 뚱뚱한 사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더만 극입니다. 그리고 무대는 지구본처럼 둥글게 납작해집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마요르카의 독백』, 크리스타 플라이슈만 녹음, ORF 1981)

막스 라인하르트가 잘츠부르크로 데려온 예술가들의 국제적 명성, 창립자들의 비전, 그리고 특히 막스 라인하르트의 뛰어난 해외 인맥 덕분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매우 빠르게 자리 잡았다. “[…] 갑자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고, 말하자면 현대의 예술 올림픽이 되어 모든 국가가 자신의 최고 성취를 선보이기 위해 경쟁했다 […]. 왕과 왕자들, 미국의 백만장자와 영화배우, 음악 애호가, 예술가, 작가와 속물들이 모두 잘츠부르크에서 만났다 […].”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1944)

그러나 잘차흐 강변의 도시로 곧 대규모 순례를 오게 된 “외지인들”에 대한 잘츠부르크 시민들의 관계에는 마찰이 없지 않았다. 문화관광의 호황은 오래지 않아 비판을 받았고, 지역 주민들은 흔히 자신들이 단순한 부속물의 역할로 격하되었다고 느꼈다. “그들은 위협을 느꼈기에 불평했고, 앞으로 올 외지인들과 미리 싸웠으며, 평화와 고요를 원한다는 옛 오스트리아 선거 구호를 되새김으로써 혁명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가 이전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용: 돕슈, 『역사』, 1996)

마침내 1930년대 초부터 나치의 영향 아래 외국인 혐오의 최악의 형태인 반유대주의가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유대인이었던 막스 라인하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활동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1938년부터 유대인 예술가들은 잘츠부르크에서 공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예더만』은 다른 많은 유대인 예술가 동료들의 작품과 함께 프로그램에서 사라졌다. 잘츠부르크는 더 이상 국제적 대중의 무대가 아니었다. 페스티벌은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했고, “정치가 무대화될 수 있는 장소”라는 나치 선전기구의 톱니바퀴가 되었다. (로베르트 크리히바우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1960년부터 1989년까지의 역사』, 2010 참조)

전쟁 직후 페스티벌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과거의 부흥은 마찰 없이 가능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예술가들은 망명했거나 살해되었다. 이 급진적 변화는 페스티벌에 있어 새로운 출발에 가까웠으며, 미국 점령군의 사명과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럼에도 시대 변화와 나란히 일어난 단절들 사이에는 인물과 내용 양면에서 연속성의 요소도 드러난다. “망명했던 저명한 예술가들을 다시 초청하는 것 외에도 […], 노력은 무엇보다 대립적 인물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탈나치화에 집중되었다.” (로베르트 크리히바우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1945년부터 1960년까지의 역사』, 2007)

1918/20년 시기와 마찬가지로, 1945년에도 국가들을 결집시키고 새로운 오스트리아 정체성을 일깨우려 했던 창립자들의 구상으로의 회귀는 잘츠부르크에 중심적 의미를 지녔다. “1945년 페스티벌의 개막은 1938년 이전 시대로 돌아가려는 정치적으로 의식적인 단절이었을 뿐 아니라, 이를 무대화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크리히바우머, 『페스티벌 역사』, 2010)

1950년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공고화는 오스트리아와 유럽의 경제 정상화와 병행되어 이루어졌다. 오스카 프리츠 슈와 그의 “잘츠부르크 드라마투르기”(잘츠부르크를 위한 연극 개념)는 정신적으로 호프만스탈과 라인하르트의 프로그램적 구상을 계승하는 한편, 고트프리트 폰 아이넴과 함께 세계 초연을 선보이고 프로그램을 확장함으로써 새로운 강조점을 마련하고자 했다. 마침내 냉전 한가운데, 페스티벌이라는 미시세계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새로운 잘츠부르크 죽음의 춤과 오스트리아 여권에 관련된 기괴한 문화적·정치적 사건이었다.

클레멘스 홀츠마이스터의 설계에 따라 건립된 대축제극장이 1960년 여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공연으로 개관한 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이 시대는 “경제 기적의 천재”(테오도어 W. 아도르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카라얀 시대’는 약 30년간 지속되었으며, 논의의 중심은 창립자 후고 폰 호프만스탈, 막스 라인하르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세운 특별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구상을 보존하는 데 있었다. ‘잘츠부르크를 위한 연극 개념’의 필요성도 수십 년의 주기와 함께 세 차례의 물결로 대두되었다. 또한 전문 비평,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클레멘스 홀츠마이스터·오스카 프리츠 슈를 중심으로 한 집단이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세 층위가 있었는데, 이들은 창립자들의 구상을 시대에 맞게 조정할 것을 주장하고 특히 풍경과 예술의 연계를 촉진했다. 일부 지역 정치인들 역시 페스티벌의 개방과 민주화를 요구했다.” (크리히바우머, 『페스티벌 역사』, 2010)

카라얀 시대 이후로는 늦어도 페스티벌 구상과 프로그램 정책에 관한 논의가 매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같은 규칙성으로 페스티벌의 쇠퇴 또한 예언되었다.

대축제극장의 2,200석을 채워야 할 필요성 때문에 프로그램 조정은 당연히 불가피했고, 이는 19세기 대오페라 레퍼토리에 대한 상대적 제한을 의미했다. 경제적 결과도 뒤따랐다. 많은 이들은 페스티벌의 미래가 부유하고 아름다운 이들, 바니타스와 허영의 시장의 지배에 희생되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빈의 잡지 『포룸 데스 아카데미커스』는 대부분의 좌석을 아마도 미국과 세계 각지의 상류사회 구성원들로 채워야 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취리히의 신문 『벨트보헤』에서 로베르트 융크는 잘츠부르크가 대중적 사업체가 될 수 있고, 문화 자본이 낭비되며, ‘뮌히스베르크의 오페라 벙커’가 오래된 문화도시 정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우려했다.” (게르트 케르슈바우머, 『전후 시기의 화려한 시대 부활』, 1994)

당시 표명된 많은 우려는 정당했으며 – 많은 것은 반감과 편견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러나 늦어도 1980년대 중반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철학에 관한 논쟁이 격화되었고, 급진적 변화의 필요성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동유럽을 향한 국경이 열리던 바로 그 1989/90년에, 잘츠부르크에서도 미래를 위한 방향이 설정되고 제라르 모르티에가 “새로운 잘츠부르크”를 선언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죽음, 빌프리트 하슬라우어 주지사의 사임, 철의 장막 붕괴는 예술과 지역 정치, 세계 정치에서 변화의 일치를 가져왔다.” (크리히바우머, 『페스티벌 역사』, 2007)

제라르 모르티에, 페터 슈타인, 한스 란데스만 체제 아래 연극 분야와 콘서트 프로그램은 더 큰 비중을 부여받았다. 오페라 레퍼토리는 완전히 새로워졌고 많은 초연을 선보였으며, 특히 현대음악이 더 큰 역할을 차지했다. 새 예술감독은 카라얀식 국제적 사교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를 거부했지만, 정치적 논의에는 웅변적으로 참여했고, “보호와 치유의 장소로 의도된 페스티벌을 1990년대에는 개척적 시도와 대결의 장소로” 열어놓았다(제라르 모르티에, 제라르 모르티에/한스 란데스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1992–2001』, 2001).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 정식화한 목적과 의무는 과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전통이 되었는가? 이른바 호프만스탈 이데올로기는 상충하는 야망과 그 프로그램적 구현, 성스러운 예술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축제적 제도로서의 연극 사이를 가르는 슬라럼이었다 […].” (제라르 모르티에, 같은 책)

페터 루치카 역시 망명을 강요당했던 작곡가들을 복권함으로써 “잘츠부르크를 위한 연극 개념”, 혹은 그 “역사적·도덕적으로 오래 지연된 새로운 규정”(페터 루치카)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이는 시대의 징후를 반영한 것이며, 2006년 시즌의 대규모 프로젝트 또한 마찬가지다. 모차르트 레퍼토리가 관심의 전면에 놓이지 않았던 몇 해를 거쳐, 모차르트 기념의 해에 그의 모든 오페라를 무대 공연으로 선보이는 모차르트 22의 시기가 무르익은 듯했다. “1999년, 잘츠부르크를 위한 새로운 연극 개념과 다음 초연을 넘어 지속적 의미를 갖도록 의도된 페스티벌 구상의 시작을 계획할 때부터, 나는 이미 이 위험한 기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 그러나 하나의 생각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잘 이해한다. 연극사에서 유례없는 이 프로젝트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어떤 다른 오페라 극장이나 어떤 다른 페스티벌에서도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잘츠부르크에서, 오직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만 이러한 기획은 생각조차 가능했다.” (페터 루치카, 『잘츠부르크 5년! 분노 없는 회고?』, 2006)

카라얀 이전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그 이후의 시기도 상충하는 목표들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최고 수준의 질을 제시하고, 효율적이며 경제적으로 운영하는 동시에 실험을 허용하거나, 최근 몇 년간 점점 더 그러했듯 젊은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끊임없이 새롭게 정식화되는 과제가 그러하다.

예술감독 위르겐 플림의 시대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드라마투르기적으로 기반을 두고, 정신적 의미에서 다시 축제적 성격에 다가가고자 했다. 가치가 상실되는 새로운 시대에 이는 “오래된 개념들, 아니 가치들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들을 성찰함으로써”(위르겐 플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매거진』, 2009) 예술을 통해 발언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반영한 대응책이었다. “강자들의 게임”을 주제로 한 2009년 시즌 준비가 세계 경제위기, 즉 “세계 금융시장의 근본적 결함”(위르겐 플림, 같은 글)에 의해 뒤덮인 것은 역사의 잔혹한 아이러니 중 하나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2010년에는 기념의 해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자신의 역사를 성찰하면서 “신화”라는 주제에 주목했다. “호프만스탈은 처음부터 자신이 하나의 신화를 창조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배후에는 예술을 통해 잃어버린 통일성을 재구성하여 정신적·문화적 쇠퇴를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처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매년 세계에 상기되어야 하는 신화, 의식, 이야기가 되었다. 이 신화는 오직 비판에 의해서만 활기 있게 유지된다 […].” (미하엘 피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매거진』, 2010) 동시에 201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주제와 볼프강 림의 새로운 음악극 세계 초연은 “축제로서의 연극”이라는 생각을 가리켰다. 종교 축제의 틀 안에서 “제의와 연극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이상적 이미지”로 간주되었던, 며칠 동안 계속된 장엄한 디오니소스 축제를 환기하고자 한 것이다. (슐러, 『무대로서의 제단』, 2007)

© 마르가레테 라징어, 엘리자베스 모티머 번역 /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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